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한 남자의 이름이 거론된다. 실비오 게젤(Silvio Gesell).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독특한 인물은 경제학자이자 사상가로, 화폐에 대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유명하다. 그의 생각은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늙는데 왜 돈은 안 썩을까? 돈에도 생명이 있어야 경제가 살고 인간 세상이 산다.'
게젤의 삶과 사상은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1890년, 28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그는 베어링 위기로 촉발된 대혼란을 목격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외채 상환 불능으로 영국 최대 은행이자 아르헨티나 경제를 지탱하던 베어링 브라더스 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 사태는 당시 아르헨티나는 물론 영국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위기 와중에 게젤은 경제 원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화폐의 본질과 기능에 주목했다. 왜 돈만이 유일하게 영원불멸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세상 만물이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늙어가는데, 오직 화폐만이 시간에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탐구 끝에 나온 해답이 바로 '늙는 돈(Aging Money)' 이론이었다. 화폐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줄어드는 '생명 주기'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화폐 발행 이듬해부터 일정 비율로 가치를 계속 깎아나가는 '자유화폐(Freigeld)'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게젤의 아이디어는 화폐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엎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돈의 축적과 부의 집중을 막고, 화폐의 교환 기능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경제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생길 것이라 믿었다. 불과 몇 년 뒤인 1906년, 그는 늙는 돈 이론을 정식으로 출판했다.
게젤의 생각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자유화폐 실험이 이뤄졌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돈을 쓰려는 유통 수요가 증가하면서 경기가 회복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게젤 사후에도 늙는 돈 운동은 계속되어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지역화폐 형태로 운용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게젤의 아이디어가 주목받았다. 당시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케네스 로고프 등이 마이너스 금리를 제안했는데, 이는 게젤의 자유화폐와 유사한 발상이었다. 마이너스 금리는 통화가치 하락을 의미하므로, 돈을 모으기보다는 쓰게끔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경제가 초유의 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게젤의 이름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급격한 유동성 확대로 화폐가 남발되자 일각에서는 자유화폐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게젤은 경제적 욕망과 화폐의 병적 집착을 경계했다. 그 때문에 늙는 돈 이론은 '탐욕을 배제한 시장경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젤은 생전에 이론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은 생각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돈의 본질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기억해야 할 명언: "화폐란 철학이며 제도다." (요하임 A.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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